영국은 정부가 에너지개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석탄은 물론 1970년대부터 북해에서 생산되는 석유,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가 풍부한 국가이기 때문에 특정 에너지원을 육성하기 보다는 대체적으로 시장원리에 따른다. 원전 건설 역시 정부가 직접 나서는 대신 민간 기업들이 건설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외국 원전 기업들이 영국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으며 최근 중국이 14조원을 영국의 원전 건설에 투자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 따른 것이다.
[ 에너지 수요 해결을 위한 영국의 선택, 원자력 ]
자연히 영국의 에너지 수급 구조는 경제성이 높은 원자력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영국이 원자력발전의 필요성을 절감한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소는 에너지수요 증가다. 전기소비량이 2030년에는 현재의 두 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등장하는 등 인구증가와 산업발전에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두 번째는 현재 진행 중인 지구온난화 및 화석연료 사용감축 논의의 여파다. 화석 연료가격 상승에 대비하고 탄소배출량을 줄여 환경과 경제적 장점이라는 두 요인을 동시에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원자력발전이 대체연료로서 대중적인 수용을 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영국이 신규 원전 건설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북해 유전이 급속도로 고갈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오는 2020년이면 북해 유전이 고갈될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영국 정부와 석유 기업들이 북해 지역에서 새로운 유전을 찾기 위한 탐사와 시추작업을 하고 있지만 대규모 유전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만일 북해 유전이 고갈된다면 영국으로써는 더 많은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입해야하는 불가피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영국 정부의 입장으로선 ‘원자력’만한 현실적 대안이 없는 것이다.
이밖에 석유와 가스수송 과정의 취약성 때문에 안보 차원에서 원자력발전 신규건설 논의가 촉진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송유관과 가스관에 대한 테러 가능성이나 관리 문제는 화석연료를 활용하는 데 지속적으로 제기되던 문제였다.
이와 관련해서 영국 정부는 2012년 12월, 한동안 신규 확장이 중단되어 있던 영국 내 원전 연료 공급망을 재구축하기 위한 실행계획을 발표했다. 자국 내 원전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영국이 공급기지 역할을 하여 해외에도 판로를 적극적으로 넓히겠다는 의도다. 또 지난 8월에는 태양전력에 대한 보조금을 90% 축소하고 육지 내 풍력 보조금도 줄이는 등 청정에너지에 대한 보조금을 삭감한 반면 힌클리포인트 C 원전에는 35년간 1메가와트시(MWh)당 92.50파운드의 가격을 보장하는 보조금 제도를 승인했다. 유럽 국가들이 재정부담에 대한 압박으로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보조금을 줄여나가고 있는데, 영국 역시 재정부담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영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한 국가다. 그만큼 노후한 원전이 많은 영국은 얼마전부터 신규 원전 건설에 적극 나서고 있다. 영국 정부는 원자력 발전을 경제적이고 안정적인 에너지 수급과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중요한 에너지원의 하나로 인식해 기존 노후화된 원전의 대체 등 오는 2025년까지 18GW 규모의 원전 10기를 신규 도입할 계획이다.
[ 투명성 높여야 수용성도 높아진다 ]
“영국인들은 원전 부작용보다 이산화탄소 증가로 인한 피해를 더 우려한다. 때문에 원전과 신재생에너지가 유용한 에너지원이라고 생각한다.”
로빈 그라임스 임페리얼대 원자력공학센터장은 “영국 국민들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도 높은 수준의 신뢰도를 유지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영국 국민들의 이같은 수용성은 세심한 계획과 투명한 정보 공유 등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영국은 방사성폐기물을 저준위, 고준위에 따라 4가지로 나눠서 처리하고 있으며 원전 계획단계부터 건설, 운영, 폐기물 처리까지 세심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완벽하게 실행한다는 데 주력하고 있다. 원전 품질서류 검증체계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독립적인 검증기관의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검증과정에서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산업 이해관계자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그 신뢰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또, 다방면의 보건 및 안전규제, 엄격한 사고분석 등을 통해 안전성을 제고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물론 영국도 원전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1977년의 윈즈케일(Windscale) 재처리공장 증설문제를 둘러싼 논쟁, 1980년 착공된 토네스(Torness)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대한 반대, 해외로부터의 사용 후 연료 반입에 대한 반대 등이 있었다. 특히 1997년 셀라필드(Sellafield) 재처리장 실패는 이후 영국 방사성폐기물 관리정책을 대대적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됐다.
다양한 시민참여 방식(여론조사, 워크숍, 합의회의, 시민패널, 포커스 그룹 등)을 계속 시도하고, 방사성폐기물 관리를 감독할 새로운 독립기구를 출범시켰다. 1999년에는 새로운 투명성 정책(지역주민의 의견수렴, 정보 제공, 정책결정에 도달한 과정 공개)을 채택했다. 원전 폐로와 관련한 정보 역시 투명하게 시민에게 공개하고 논의하는 제도를 구축하고 있다. 원전 해체 시장에서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폐로 그 이후’와 관련한 논의도 이미 본격화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결과 후쿠시마원전 사고 이후인 2012년 1월 여론조사 결과에서 응답자의 50%가 신규원전 건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 새로운 이슈 ‘안보’ ]
최근 영국에서 원전과 관련해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이슈는 ‘안보’다. 영국 정보당국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영국 방문기간에 원전 건설 프로젝트 협력에 합의하는 문서에 서명하기 앞서, 중국의 영국 내 원자력발전 건설이 안보를 위협한다는 우려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지난 10월 18일(현지시간) 감청기관인 영국 정보통신본부(GCHQ)가 중국 측 기업들이 건설에 참여하는 원전들의 컴퓨터 시스템들과 사이버안보를 면밀히 살필 것이라고 보도했다.
더 타임즈는 중국이 ‘트랩도어’(trapdoor·시스템 설계자가 고의로 만들어놓은 시스템의 보안 구멍)를 몰래 심어 양국 외교관계가 악화할 경우 원전을 조종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정보당국이 제기했으나 중국과의 합의를 주도하는 재무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하여 노동당 예비내각 에너지장관인 리사 낸디 의원은 가디언지에 “국민들이 (중국의 원전 투자 허용은) 영국의 에너지 안보는 물론 국가 안보를 잠재적인 위협에 처하게 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내에서의 이러한 논란은 왜 원전 기술을 국산화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프랑스와 달리 영국의 원전은 현재 로자톰이나 아레바와 같은 해외 기업들이 건설하고 있다. 특히 최근 급부상중인 중국의 원전 기업들이 영국 시장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시장원리에 따른다는 정부의 방침상 기술 수준에 차이가 크지 않다면 건설과 운영비를 낮게 입찰한 기업이 영국 내 원전 사업을 수주할 것이고, 중국은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하나다. 영국 정부에서 중국의 참여를 달갑게 여기지 않더라도 시장에서 선택된 이상, 그리고 중국과 굳이 마찰을 일으키고 싶은 것이 아닌 이상 중국 기업에 낙찰된 이후에는 계약을 이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원전 기술을 국산화하고 설계와 건설, 운영을 자국의 산업계에서 소화 가능하다면 굳이 안보 위험을 감수하면서 해외 기업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마찰이 생길 여지가 애초에 사라지는 셈이다. 원전을 전략 산업으로 분류하여 보안에 만전을 기하고, 국내에서 원전 기술 국산화에 힘을 쏟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본 기사는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아톰스토리(http://atomstory.or.kr)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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